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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

sijo.jpg신라 제56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여덟째 아들 김추(金錘)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삼척군(三陟君)에 봉(封)하여져 자손들이 관향(貫鄕)을 삼척(三陟)으로 하였으며 그의 외아들 위옹(渭翁)이 검교사농경(檢校司農卿)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주국(上柱國)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冊祿)되어 실직군(悉直君)에 봉(封)하여졌다가 고려왕실에서 경순대왕(敬順大王)의 후손(後孫)으로는 유일(唯一)하게 실직군왕(悉直郡王)으로 책봉(冊封)되면서 그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지배하였다.

 

그의 장남 김자영(金自英)은 배융교위(陪戎校尉) 차남 자남(自男)은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였고, 5세손 복영(僕永)는 관찰사(觀察使), 승련(承鍊)은 사공(司空:정1품)을 지냈고, 6세손 정위(正位)는 동래부사(東來府使), 7세손 자주(自柱)와 10세손 윤성(允成)은 대장군(大將軍), 정휘(正暉)는 도통사(都統使) 대장군(大將軍), 산수(山壽)는 안동부사(安東府使), 11세손 득강(得江)은 간의대부(諫議大夫), 해(偕)는 호부상서(戶部尙書), 응(膺)은 상장군(上將軍) 등을 역임(歷任)하였고, 인궤(仁軌)는 충열왕(忠烈王) 16년(1290년)에 합단적(哈丹賊)의 칩임시 호군(護軍)으로서 왕(王)을 호위(護衛)하여 많은 공(功)을 세워 가야향(加也鄕)을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昇格)시켜 주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11세손 천봉(天奉)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13세손 익정(益精)은 이부상서(吏部尙書), 학(鶴)은 전의감(典醫監), 광연(光鍊)은 전리판서(典理判書), 광유(光裕)는 중랑장(中郞將), 14세손 충민(忠敏)은 한성판윤(漢城判尹), 미(美)는 대사간(大司諫), 15세손 성경(成慶)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욱(郁)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순(仲淳)과 계순(季淳)은 상장군(上將軍), 말순(末淳)은 군자정감(軍資正監) 등을 역임하였으며,

 

“삼척김씨(三陟金氏)는 충절의 기개는 조선조에 와서도 이어져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중순(仲淳)은 단종손위(端宗遜位)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려장망혜(藜杖芒鞋)로 여생(餘生)을 마쳤다”는 기록이 상장군(上將軍) 김공묘갈(金公墓碣)에 적혀있다.

 

삼척김씨(三陟金氏)의 역대 주요인물로서 김병충(金秉忠)을 빼 놓을 수 없다. 중종반정때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과 분의결책(奮義결策)하여 연산군(燕山君)의 혼정(昏政)에 반기를 들어 중종반정을 성공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정국공신(靖國功臣) 107명중의 한분이다.

 

중종조에 동래부사(東來府使)를 지낸 김양필(金良弼)도 자랑할 만한 인물이다.

 

삼포왜란(三浦倭亂)때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 겸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부임 그 치적이 주민의 함송(咸頌)하는 바 있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인 김양보(金良輔)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분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어가(御駕)를 의주(義州)까지 호송(護送)하였다가 환어(還御)도 함께 한 공(功)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고, 척주군(陟州君)에 봉(封)해졌다. 조선조(朝鮮朝) 건국 초의 원종공신(原從功臣) 봉열대부(奉列大夫)였던 김성고(金成告), 목릉(穆陵)의 용사역(龍蛇役)에 공(功)을 세워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추증(追贈)된 김론동(金論仝)과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왕자사부(王子師傅)로서 왕(王)을 호송(護送)한 공(功)으로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으로 책록(冊祿)되어 진성군(眞城君)으로 봉(封)하여진 김기문(金起文) 등을 향사(享祀)하는 삼공신묘(三功臣廟)는 충의(忠義)가 가치기준이 되었던 그 시대의 상징적 존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조를 개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개국2년(開國2年)에 고조부(高祖父)인 이안사(李安社)와 비(?)를 목조대왕(穆祖大王)과 효공왕후(孝恭王后)로 추존(追尊)하면서 목조대왕(穆祖大王)이 부모와 같이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진외조부인 11세손 김인궤(金仁軌) 가문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으면서 거주(居住)하였던 삼척군(三陟郡)을 부(府)로 승격(昇格)시키면서 고려조(高麗朝)에서 호군(護軍) 전객령(典客令) 전법총랑(典法摠郞), 조현대부(朝顯大夫)를 역임(歷任)하였던 김인궤(金仁軌)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추봉(追封)하고 삼척시 미로면 노동에 있는 5대 조부(祖父)인 이양무(李陽茂)의 묘(墓)와 미로면 동산리에 있는 비(?)의 묘(墓)를 준경릉(濬慶陵)과 영경릉(永慶陵)으로 높이고 양릉(兩陵)에 매년 명절시 참례(參禮)하여 제(祭)를 올릴 수 없으므로 친히 사용하던 관복대(官服帶)인 홍서대(紅犀帶)를 삼척부사(三陟府使)에게 하사(下賜)하고 부사(府使)로 하여금 동 홍서대(紅犀帶)를 착복대(着服帶)하여 제(祭)를 대행(代行)케 하여 오다가 영조(英祖) 23년(서기 1747년)에 왕명(王命)으로 홍서대(紅犀帶)를 삼척김씨(三陟金氏) 종중(宗中)에 하사(下賜)하였다. 홍서대(紅犀帶)는 강원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삼척김씨(三陟金氏) 보본단(報本壇) 경내(境內) 보대운한각(寶帶雲漢閣)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또한 태종원년(太宗元年)(서기 1400년)에 왕(王)의 전교(傳敎)로 신라경순대왕(新羅敬順大王)의 후손(後孫)을 대대(代代)로 보살피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며 비록 지서(枝庶)라도 군보(軍保)에 정하지 말며 사태(沙汰)시 동원(動員)하지 말고 고강(考講)할 때 강례(講例)에 들지 않도록 정녕(丁寧)하게 신칙(申飭)하시었다.

 

그 후에도 선조(宣祖:1567년~1608년) 효종(孝宗:1649년~1659년)왕때도 같은 교지(敎旨)를 하였다고 규장각소장도서(奎章閣所藏圖書 상백고 929.2G429)인 김씨소원록(金氏溯源錄)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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